앙드레 소르네(Andre Sornay)는 할아버지인 클라우디우스(Claudius Sornay), 아버지인 요하네스(Johannes Sornay)의 뒤를 이어 가구 사업을 물려 받았습니다. 전통적인 가구 제작 공방 장인 집안에서 태어난 앙드레 소르네는 사실 화가가 꿈이었고, 가업을 이어받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17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시면서, 소르네는 갑작스럽게 가업을 이어받게 됩니다. 이 시기 앙드레 소르네는 에꼴 데 보자르(Ecole des buax-arts de Lyon)에 막 입학한 시점이었고, 학업과 가업을 오갔지만 결국 학업은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에꼴 데 보자르에서 맺은 수많은 인연은 앙드레 소르네가 가구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쌓아가면서 활발하게 교류를 이어가게 됩니다. 특히 수잔 루낭(Suzanne Lunant)과의 만남은 결혼으로 이르게 되며, 서로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수잔 루낭은 에꼴 데 보자르에서 ‘Fleur’ 코스(텍스타일 디자인)를 수석으로 졸업한 재능있는 재원으로 졸업 후 소르네와 결혼하게 된 1925년까지 비앙시니 페리에에서(Bianchini-Ferrier) 실크 디자이너로 일을 했습니다. 이 시기 수잔 루낭은 당대의 화가이자 비앙시니 페레에의 또 다른 디자이너였던 라울 뒤피(Raoul Dufy)와 함께 활발한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소르네의 가구를 장식하는 패턴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소르네의 가구를 장식한 수잔 루낭의 다양한 장식 디자인은 그의 아방가르드(Avant-Garde)한 예술 혼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금속과 나무를 넘나드는 그의 장식은 데스틸(De Stijl)의 성향을 보여주기도 하며 상당한 완성도를 보여 줍니다.
앙드레 소르네와 수잔 루낭의 관계는 인생의 동반자 그 이상이었습니다. 수잔의 아버지인 죠세프 루낭(Joseph Lunant)은 에꼴 쌍뜨랄에서(Ecole Centale) 엔지니어링을 전공한 수재로, 자동차 개발의 개척자였습니다. 수잔 루낭이 어린 시기에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떨어져 살았지만,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은 오빠인 앙드레 루낭(Andre Lunant)과는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으며, 앙드레 소르네 역시 그와 꽤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는 앙드레 소르네의 작업에 전환기적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앙드레 소르네는 초기 소량의 러셔리한 가구를 생산하면서 항상 마음속으로 강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는데, 자신의 가구를 더 많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사용되기를 바라는 희망이었습니다. 바로 ‘대량 생산’에 대한 꿈이었으며, 가구를 시스템화, 규격화하는 것에 대한 비전이었습니다. 소르네가 자동차 개발을 개척한 루낭과 가까이 지내면서 분업화, 규격화된 자동차 생산 시스템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이는 소르네가 후일 띠게떼(Tiggetes)시스템을 통해 규격화된 시스템과 동시에 창의적인 가구를 생산하는 대량생산 체계를 만드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앙드레 소르네가 1953년 특허등록을 마친 띠게떼 시스템은 오늘날 스웨덴 가구 회사 이케아가 사용하고 있는 ‘볼트와 너트 몇 개만 가지고도 혼자서 완성할 수 있는 가구’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띠게떼의 핵심은 고도의 복잡한 가구 조립 공정을 볼트와 너트로 조립이 가능하도록 단순화 시키면서, 일부 파손된 부분에 대해 ‘교체’가 가능하도록 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용할 수 있는 가구의 원형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디자이너] 앙드레 소르네 (Andre Sornay)
앙드레 소르네(Andre Sornay)는 할아버지인 클라우디우스(Claudius Sornay), 아버지인 요하네스(Johannes Sornay)의 뒤를 이어 가구 사업을 물려 받았습니다. 전통적인 가구 제작 공방 장인 집안에서 태어난 앙드레 소르네는 사실 화가가 꿈이었고, 가업을 이어받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17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시면서, 소르네는 갑작스럽게 가업을 이어받게 됩니다. 이 시기 앙드레 소르네는 에꼴 데 보자르(Ecole des buax-arts de Lyon)에 막 입학한 시점이었고, 학업과 가업을 오갔지만 결국 학업은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에꼴 데 보자르에서 맺은 수많은 인연은 앙드레 소르네가 가구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쌓아가면서 활발하게 교류를 이어가게 됩니다. 특히 수잔 루낭(Suzanne Lunant)과의 만남은 결혼으로 이르게 되며, 서로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수잔 루낭은 에꼴 데 보자르에서 ‘Fleur’ 코스(텍스타일 디자인)를 수석으로 졸업한 재능있는 재원으로 졸업 후 소르네와 결혼하게 된 1925년까지 비앙시니 페리에에서(Bianchini-Ferrier) 실크 디자이너로 일을 했습니다. 이 시기 수잔 루낭은 당대의 화가이자 비앙시니 페레에의 또 다른 디자이너였던 라울 뒤피(Raoul Dufy)와 함께 활발한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소르네의 가구를 장식하는 패턴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소르네의 가구를 장식한 수잔 루낭의 다양한 장식 디자인은 그의 아방가르드(Avant-Garde)한 예술 혼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금속과 나무를 넘나드는 그의 장식은 데스틸(De Stijl)의 성향을 보여주기도 하며 상당한 완성도를 보여 줍니다.
앙드레 소르네와 수잔 루낭의 관계는 인생의 동반자 그 이상이었습니다. 수잔의 아버지인 죠세프 루낭(Joseph Lunant)은 에꼴 쌍뜨랄에서(Ecole Centale) 엔지니어링을 전공한 수재로, 자동차 개발의 개척자였습니다. 수잔 루낭이 어린 시기에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떨어져 살았지만,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은 오빠인 앙드레 루낭(Andre Lunant)과는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으며, 앙드레 소르네 역시 그와 꽤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는 앙드레 소르네의 작업에 전환기적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앙드레 소르네는 초기 소량의 러셔리한 가구를 생산하면서 항상 마음속으로 강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는데, 자신의 가구를 더 많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사용되기를 바라는 희망이었습니다. 바로 ‘대량 생산’에 대한 꿈이었으며, 가구를 시스템화, 규격화하는 것에 대한 비전이었습니다. 소르네가 자동차 개발을 개척한 루낭과 가까이 지내면서 분업화, 규격화된 자동차 생산 시스템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이는 소르네가 후일 띠게떼(Tiggetes)시스템을 통해 규격화된 시스템과 동시에 창의적인 가구를 생산하는 대량생산 체계를 만드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앙드레 소르네가 1953년 특허등록을 마친 띠게떼 시스템은 오늘날 스웨덴 가구 회사 이케아가 사용하고 있는 ‘볼트와 너트 몇 개만 가지고도 혼자서 완성할 수 있는 가구’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띠게떼의 핵심은 고도의 복잡한 가구 조립 공정을 볼트와 너트로 조립이 가능하도록 단순화 시키면서, 일부 파손된 부분에 대해 ‘교체’가 가능하도록 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용할 수 있는 가구의 원형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